2025 별빛물빛 콘서트 in 양평, 발레 <김용걸의 프로미나드>
베르사유에서 양평까지, 발레로 나선 산책길
이단비/ 무용전문작가·<발레, 무도에의 권유> 저자
프랑스 파리 근교에 있는 베르사유 궁전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방들과 정원으로 유명하다. 있는 그대로의 매력을 담은 영국식 자연정원과 달리 기하학적 대칭과 조형미의 정점을 보여주는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은 인간의 손길이 닿은 프랑스식 정원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이 정원을 특별히 사랑한 왕은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자신을 내쫓으려는 귀족들의 반란을 겪으며 성장한 루이 14세는 바로 이곳에서 정치적 힘을 길렀다. 프로미나드(promenade). 프랑스어로도, 영어로도 ‘산책’을 뜻하는 단어이다.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과 정원을 산책하며 왕권을 강화하고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쏟아냈을까. 이 정원에서의 산책은 단순히 호기로운 것이 아니었다. 즉, 베르사유 궁전 정원의 웅장한 아름다움은 누구도 감히 대적하지 못할만한 왕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용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절대군주의 이미지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선택한 또 한 가지는 발레였다.
무대 위와 뒤, 클래스로 바라본 발레 무용수의 삶
베르사유 궁전은 발레와 프랑스의 문화예술의 중심지이자 절대군주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문화예술을 발레로 정립시킨 것은 물론, 본인이 직접 발레 무대에 무용수로 서기도 했다. 당시에 발레는 왕과 귀족들이 추는 춤이었다. 1669년, 루이 14세는 오페라와 발레의 교육과 공연을 담당하는 왕립음악아카데미를 세운다. 이제 이 아카데미를 통해 전문적으로 발레를 공연하는 무용수들이 등장함으로써 발레는 왕과 귀족이 예술과 유희의 가면을 쓰고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것에서 벗어나 예술 그 자체로 주목받게 됐다. 이 아카데미가 오늘날 우리가 아는 파리오페라발레단이다.
이런 맥락에서 2025 별빛 물빛 콘서트 in 양평에서 올해 두 번째로 선보인 무대 <김용걸의 프로미나드>는 특별하다.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서 무용수로 활약했던 김용걸이 자신의 이야기와 발레의 역사를 접목해서 풀어놓고, 실연 작품을 선보인 자리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립발레단의 주역이자 아시아 발레리노 최초로 파리오페라발레단에 입단한 무용수 김용걸은 교육자로, 안무가로도 종횡무진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번 공연은 그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수로서 서는 마지막 행보이기도 하기 때문에 동시에 새로운 길로 산책을 나아가기 위해 출발 지점이 되기도 했다.
별빛물빛 콘서트 2월 발레 <김용걸의 프로미나드> Ⓒ 양평문화재단
이 공연의 첫머리에 김용걸이라는 한 예술가가 고향 땅에서 주역의 자리를 내려놓고 파리에 처음 건너가 생활하고 고민했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일부와 무대 위를 종횡무진 날아다녔던 무용수 시절의 공연 하이라이트 영상을 함께 보여준 건 의미심장했다. 관객은 이를 통해 한 무용수가 무대 위와 뒤에서 보여주는 두 모습을 통해 무용수의 삶이 어떤지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무대 위에서는 환상적 존재이지만 무대 뒤에서는 한 사람으로서 감내해야 할 수많은 서사들이 이 영상과 곧이어 실연으로 보여준 발레 클래스 무대에 점철돼 있었다.
김용걸과 세 명의 무용수는 발레 무용수들이 바와 센터에서 훈련하는 여러 동작들 중 핵심적인 부분을 발췌해서 클래스를 직접 시연했다. 전 세계 어느 발레단이든 발레단에 입단한 무용수들은 매일 오전 1시간 반~2시간 동안 이 클래스를 한 후에 각자 공연작품에서 자신이 맡은 역을 연습하는 리허설에 들어간다. 이런 훈련은 18세기부터 점차 다듬어져서 지금과 같은 형태로 정착이 됐다. 이번 공연에서는 발레 무용수들이 어떤 훈련으로 하루를 시작하는지 보여줌으로써 무대 위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들이 매일매일 기본을 다지는 이 과정에서 나온다는 점을 알리면서 공연의 문을 열었다.

별빛물빛 콘서트 2월 발레 <김용걸의 프로미나드> Ⓒ 양평문화재단
정형미의 정수 고전발레, 감정의 서사 드라마발레
이번 공연은 김용걸이 직접 해설자이자 진행자로 발레에 대한 강의와 토크의 형식을 갖고 있는데다 소극장 무대에서 관객과 가까이 진행했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무대에서도 느낄 수 없는 에너지가 채워진 점이 큰 장점이었다. 발레 클래스를 소개한 이후 19세기 고전발레부터 현재의 창작발레까지 발레사의 흐름을 김용걸의 해설과 실연을 통해 하나씩 짚어나가면서 발레와 함께 산책했다. 19세기 고전발레의 미는 <백조의 호수> 속 흑조 독무를 통해 드러냈다. 17세기만 해도 여성들은 땅에 끌리는 긴 드레스를 입고 춤을 췄지만, 18세기 드레스 자락을 과감하게 자르기 시작하면서 여성의 발레 테크닉은 지금처럼 발달하게 됐다. 이번 흑조 무대에서 무용수가 입고 나온 접시 모양의 짧은 치마 튀튀(tutu)는 그렇게 탄생한 의상이다. 이번 무대에서 관객들은 다리의 자유를 얻은 흑조가 발레의 기술을 얼마나 발전시켰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고전발레는 이후 발레의 기술과 표현의 발달에 있어서 기준점이자 교과서가 되었다.
이어서 선보인 <로미오와 줄리엣>은 발레사에서 고전발레와 20세기에 태동한 드라마발레를 잇는 가교가 된 작품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다양한 안무 버전이 있는데 이번 무대에서 선보인 건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에서 초연한 작품이다. 19세기 고전발레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마임을 통해서 대사를 전하는 점이다.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문학에서 이야기를 가져와 발레로 만든 드라마발레가 탄생하면서 복잡하고 다변적인 사람들의 심리가 춤 안에 담기기 시작하면서 마임이 발레 안에서 점차 사라졌다. 마린스키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고전발레와 20세기 드라마발레의 가교가 됐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이 버전에서는 여전히 마임의 요소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몇 가지 주요 마임을 배워보는 시간도 가졌고, <로미오와 줄리엣>을 통해 그것을 확인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처음 사랑을 확인하는 파드되(2인무)는 줄리엣의 집 발코니를 배경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보통 ‘발코니 파드되’로 불린다. 다른 버전들은 줄리엣을 발코니에 앉히거나, 혹은 줄리엣이 발코니로 올라가며 로미오와 애틋한 작별인사를 나누지만 마린스키 버전은 두 사람이 꼭 끌어안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면서 행복감을 배로 시킨다. 이 2인무를 통해서 무용수들의 감정표현력은 물로 리프트를 비롯한 난이도 높은 파드되의 기술을 무대 가까이에서 본 것도 특별했다.

별빛물빛 콘서트 2월 발레 <김용걸의 프로미나드> Ⓒ 양평문화재단
파격과 혁명의 이름 발레 뤼스, 새로운 물결 컨템퍼러리발레
드라마발레가 정착하기 전, 1909~1929년까지의 20년은 발레사에서 아주 획기적인 시대였다. 발레 뤼스가 창단돼서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혁명적인 작품들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김용걸은 그때 당시에 발레 뤼스가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 스트라빈스키 음악으로 안무된 <봄의 제전>을 통해 설명했다. 발레 <봄의 제전> 초연 당시 관객들이 야유를 쏟아내며 공연장을 박차고 나가고, 경찰이 출동할 정도로 난리법석이었고 발레 뤼스는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현재 이 음악과 발레는 예술사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남았다. 특히 스트라빈스키의 이 곡은 안무가들이 자신만의 ‘봄의 제전’을 갖고 싶을 정도로 탐나는 음악이 되었다. 이번 무대에서는 김용걸이 이 음악으로 안무한 <봄의 제전> 중 여성 솔로 부분을 선보였다. 현장에서 관객들은 이전의 고전발레나 드라마발레에서 접하지 못한 이색적인 에너지를 느끼며 무용수의 등장에서부터 감탄사를 자아냈다. 이 무대를 통해서 표정마저 압도적인 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한 건 물론이다.
20세기에 등장한 모던발레는 고전발레가 요구하는 엄격한 몸과 춤의 문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움직임과 표현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런 작품을 고전발레의 움직임과 구분해서 모던발레라고 부르기도 하고, 21세기 현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이라 컨템퍼러리발레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어서 선보인 김용걸 안무작 <편견>도 그런 작품 중 하나이다. 색깔은 그 자체에 선악을 포함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흰색’은 착하고 연약한 것, ‘검은색’은 악하고 나쁜 것으로 편견을 갖고 바라본다. <편견>은 흑조를 향한 사람들의 편향된 시각을 꼬집는다. 흑조의 호소를 담은 작품인 것이다. 강렬한 움직임과 의상은 시각적으로 관객을 사로잡고,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설득력 있다. 이 작품의 음악이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인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이 음악은 죽어가는 백조의 모습을 담은 <빈사의 백조>에서 쓰이면서 애처롭고 가냘픈 백조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음악이지만, 흑조의 변을 담은 이번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음악에 대한 편견 또한 깨뜨렸다고 볼 수 있다. 이 공연의 초반에 선보인 <백조의 호수> 속 흑조 솔로와 이 작품이 이어지는 것도 절묘한 구성이었다.
이번 공연의 피날레를 장식한 박소연 안무작 <헝가리안 랩소디>는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의 <헝가리안 랩소디 no.2>에 맞춰 민속적 색채의 춤과 고전발레의 미를 조화시킨 수작이었다. 고전발레 작품에는 발레와 민속춤을 접목시킨 ‘캐릭터댄스’가 종종 들어가 있다. 고전발레에서는 손과 팔의 움직임이 안으로 향한다면 캐릭터댄스에서는 바깥쪽을 향하기도 하고, 두 발을 안쪽으로 모았다가 벌려서 발 뒤꿈치를 서로 부딪히는 움직임으로 경쾌하게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은 캐릭터댄스와 고전발레의 움직임을 이질감 없이 이은 점이 뛰어났다. 붉은색 옷을 입고 등장한 남녀 무용수가 마치 대화를 주고 받듯이 춤을 추며 관객의 호응을 끌어냈고, 이번 공연을 화사하게 마무리 지었다.

별빛물빛 콘서트 2월 발레 <김용걸의 프로미나드> Ⓒ 양평문화재단
브라보와 박수 소리에 행복해지는 어느 무용수의 발
발레는 그 시작점이 이탈리아의 명문가 메디치와 프랑스 황실이었고, 19세기에는 러시아로 건너가 역시 황실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했다. 우아하지만 그만큼 장벽이 느껴지는 장르이기도 하다. 이번 공연은 김용걸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으며 관객이 친근하게 발레에 다가갈 수 있도록 진행한 점이 돋보이는 자리였다.
커튼콜의 순간, 문득 전반부에 보여준 김용걸 무용수의 파리 시절 영상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전철을 타고 가는 사람들의 발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준 장면이었다. 마지막에는 김용걸 무용수의 발이 보였다. 전자는 공간 이동의 역할을 하는 발이라 자유를 주지만, 후자는 춤을 위해 존재하는 발이자 무대 위에서 연습실에서 끊임없이 한계를 느끼게 하는 발이다. 자기 자신을 향해 “바보 같으니!”라고 분노를 표출하다가 다시 춤을 추러 나가는 한 무용수의 의지를 담은 발이었다. 무대 위에서 김용걸은 이야기했다. 무용수들은 브라보 소리와 박수 소리에 행복해지는 사람들이라고. 발레의 역사와 생명은 그 소리를 타고 저 발을 끌고 연습실로 향한 무용수를 통해 여기까지 이어졌다. 그 덕분에 발레는 프랑스의 전유물로 멈추지 않고 전 세계를 관통하는 언어로 우리에게 남았다. 작은 극장 안에서 춤추는 게 행복한 사람들과 그들을 향한 관객들의 브라보가 만났다. <김용걸의 프로미나드>, 발레가 몸의 언어이자 삶인 어떤 발레리노와 함께 한 좋은 산책이었다.

| 이단비 시사·교양·문화예술 프로그램 및 예술 다큐멘터리의 방송작가로 활동했다.발레에 빠져 다양한 춤과 발레를 배워 오면서 예술 토크와 강연 진행,발레와 현대무용 작품 창작 작업을 통해 무용전문작가로 활동하고 있다.다양한 매체에 춤과 예술에 관한 글을 기고하고,예술책을 집필하면서 무대와 객석을 잇는다. 최근 출간한 <발레,무도에의 권유>가 교보문고 뉴앤핫,세종도서로 선정됐다. |
2025 별빛물빛 콘서트 in 양평, 발레 <김용걸의 프로미나드>
베르사유에서 양평까지, 발레로 나선 산책길
이단비/ 무용전문작가·<발레, 무도에의 권유> 저자
프랑스 파리 근교에 있는 베르사유 궁전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방들과 정원으로 유명하다. 있는 그대로의 매력을 담은 영국식 자연정원과 달리 기하학적 대칭과 조형미의 정점을 보여주는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은 인간의 손길이 닿은 프랑스식 정원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이 정원을 특별히 사랑한 왕은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였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5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라 자신을 내쫓으려는 귀족들의 반란을 겪으며 성장한 루이 14세는 바로 이곳에서 정치적 힘을 길렀다. 프로미나드(promenade). 프랑스어로도, 영어로도 ‘산책’을 뜻하는 단어이다.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과 정원을 산책하며 왕권을 강화하고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민을 쏟아냈을까. 이 정원에서의 산책은 단순히 호기로운 것이 아니었다. 즉, 베르사유 궁전 정원의 웅장한 아름다움은 누구도 감히 대적하지 못할만한 왕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용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절대군주의 이미지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선택한 또 한 가지는 발레였다.
무대 위와 뒤, 클래스로 바라본 발레 무용수의 삶
베르사유 궁전은 발레와 프랑스의 문화예술의 중심지이자 절대군주의 상징이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문화예술을 발레로 정립시킨 것은 물론, 본인이 직접 발레 무대에 무용수로 서기도 했다. 당시에 발레는 왕과 귀족들이 추는 춤이었다. 1669년, 루이 14세는 오페라와 발레의 교육과 공연을 담당하는 왕립음악아카데미를 세운다. 이제 이 아카데미를 통해 전문적으로 발레를 공연하는 무용수들이 등장함으로써 발레는 왕과 귀족이 예술과 유희의 가면을 쓰고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것에서 벗어나 예술 그 자체로 주목받게 됐다. 이 아카데미가 오늘날 우리가 아는 파리오페라발레단이다.
이런 맥락에서 2025 별빛 물빛 콘서트 in 양평에서 올해 두 번째로 선보인 무대 <김용걸의 프로미나드>는 특별하다. 파리오페라발레단에서 무용수로 활약했던 김용걸이 자신의 이야기와 발레의 역사를 접목해서 풀어놓고, 실연 작품을 선보인 자리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국립발레단의 주역이자 아시아 발레리노 최초로 파리오페라발레단에 입단한 무용수 김용걸은 교육자로, 안무가로도 종횡무진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번 공연은 그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수로서 서는 마지막 행보이기도 하기 때문에 동시에 새로운 길로 산책을 나아가기 위해 출발 지점이 되기도 했다.
별빛물빛 콘서트 2월 발레 <김용걸의 프로미나드> Ⓒ 양평문화재단
이 공연의 첫머리에 김용걸이라는 한 예술가가 고향 땅에서 주역의 자리를 내려놓고 파리에 처음 건너가 생활하고 고민했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일부와 무대 위를 종횡무진 날아다녔던 무용수 시절의 공연 하이라이트 영상을 함께 보여준 건 의미심장했다. 관객은 이를 통해 한 무용수가 무대 위와 뒤에서 보여주는 두 모습을 통해 무용수의 삶이 어떤지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무대 위에서는 환상적 존재이지만 무대 뒤에서는 한 사람으로서 감내해야 할 수많은 서사들이 이 영상과 곧이어 실연으로 보여준 발레 클래스 무대에 점철돼 있었다.
김용걸과 세 명의 무용수는 발레 무용수들이 바와 센터에서 훈련하는 여러 동작들 중 핵심적인 부분을 발췌해서 클래스를 직접 시연했다. 전 세계 어느 발레단이든 발레단에 입단한 무용수들은 매일 오전 1시간 반~2시간 동안 이 클래스를 한 후에 각자 공연작품에서 자신이 맡은 역을 연습하는 리허설에 들어간다. 이런 훈련은 18세기부터 점차 다듬어져서 지금과 같은 형태로 정착이 됐다. 이번 공연에서는 발레 무용수들이 어떤 훈련으로 하루를 시작하는지 보여줌으로써 무대 위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들이 매일매일 기본을 다지는 이 과정에서 나온다는 점을 알리면서 공연의 문을 열었다.
별빛물빛 콘서트 2월 발레 <김용걸의 프로미나드> Ⓒ 양평문화재단
정형미의 정수 고전발레, 감정의 서사 드라마발레
이번 공연은 김용걸이 직접 해설자이자 진행자로 발레에 대한 강의와 토크의 형식을 갖고 있는데다 소극장 무대에서 관객과 가까이 진행했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무대에서도 느낄 수 없는 에너지가 채워진 점이 큰 장점이었다. 발레 클래스를 소개한 이후 19세기 고전발레부터 현재의 창작발레까지 발레사의 흐름을 김용걸의 해설과 실연을 통해 하나씩 짚어나가면서 발레와 함께 산책했다. 19세기 고전발레의 미는 <백조의 호수> 속 흑조 독무를 통해 드러냈다. 17세기만 해도 여성들은 땅에 끌리는 긴 드레스를 입고 춤을 췄지만, 18세기 드레스 자락을 과감하게 자르기 시작하면서 여성의 발레 테크닉은 지금처럼 발달하게 됐다. 이번 흑조 무대에서 무용수가 입고 나온 접시 모양의 짧은 치마 튀튀(tutu)는 그렇게 탄생한 의상이다. 이번 무대에서 관객들은 다리의 자유를 얻은 흑조가 발레의 기술을 얼마나 발전시켰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고전발레는 이후 발레의 기술과 표현의 발달에 있어서 기준점이자 교과서가 되었다.
이어서 선보인 <로미오와 줄리엣>은 발레사에서 고전발레와 20세기에 태동한 드라마발레를 잇는 가교가 된 작품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다양한 안무 버전이 있는데 이번 무대에서 선보인 건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에서 초연한 작품이다. 19세기 고전발레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마임을 통해서 대사를 전하는 점이다.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문학에서 이야기를 가져와 발레로 만든 드라마발레가 탄생하면서 복잡하고 다변적인 사람들의 심리가 춤 안에 담기기 시작하면서 마임이 발레 안에서 점차 사라졌다. 마린스키 버전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고전발레와 20세기 드라마발레의 가교가 됐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이 버전에서는 여전히 마임의 요소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는 몇 가지 주요 마임을 배워보는 시간도 가졌고, <로미오와 줄리엣>을 통해 그것을 확인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처음 사랑을 확인하는 파드되(2인무)는 줄리엣의 집 발코니를 배경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보통 ‘발코니 파드되’로 불린다. 다른 버전들은 줄리엣을 발코니에 앉히거나, 혹은 줄리엣이 발코니로 올라가며 로미오와 애틋한 작별인사를 나누지만 마린스키 버전은 두 사람이 꼭 끌어안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면서 행복감을 배로 시킨다. 이 2인무를 통해서 무용수들의 감정표현력은 물로 리프트를 비롯한 난이도 높은 파드되의 기술을 무대 가까이에서 본 것도 특별했다.
별빛물빛 콘서트 2월 발레 <김용걸의 프로미나드> Ⓒ 양평문화재단
파격과 혁명의 이름 발레 뤼스, 새로운 물결 컨템퍼러리발레
드라마발레가 정착하기 전, 1909~1929년까지의 20년은 발레사에서 아주 획기적인 시대였다. 발레 뤼스가 창단돼서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혁명적인 작품들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김용걸은 그때 당시에 발레 뤼스가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 스트라빈스키 음악으로 안무된 <봄의 제전>을 통해 설명했다. 발레 <봄의 제전> 초연 당시 관객들이 야유를 쏟아내며 공연장을 박차고 나가고, 경찰이 출동할 정도로 난리법석이었고 발레 뤼스는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현재 이 음악과 발레는 예술사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남았다. 특히 스트라빈스키의 이 곡은 안무가들이 자신만의 ‘봄의 제전’을 갖고 싶을 정도로 탐나는 음악이 되었다. 이번 무대에서는 김용걸이 이 음악으로 안무한 <봄의 제전> 중 여성 솔로 부분을 선보였다. 현장에서 관객들은 이전의 고전발레나 드라마발레에서 접하지 못한 이색적인 에너지를 느끼며 무용수의 등장에서부터 감탄사를 자아냈다. 이 무대를 통해서 표정마저 압도적인 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한 건 물론이다.
20세기에 등장한 모던발레는 고전발레가 요구하는 엄격한 몸과 춤의 문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움직임과 표현을 드러낸다. 그래서 이런 작품을 고전발레의 움직임과 구분해서 모던발레라고 부르기도 하고, 21세기 현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이라 컨템퍼러리발레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어서 선보인 김용걸 안무작 <편견>도 그런 작품 중 하나이다. 색깔은 그 자체에 선악을 포함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흰색’은 착하고 연약한 것, ‘검은색’은 악하고 나쁜 것으로 편견을 갖고 바라본다. <편견>은 흑조를 향한 사람들의 편향된 시각을 꼬집는다. 흑조의 호소를 담은 작품인 것이다. 강렬한 움직임과 의상은 시각적으로 관객을 사로잡고,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설득력 있다. 이 작품의 음악이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인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이 음악은 죽어가는 백조의 모습을 담은 <빈사의 백조>에서 쓰이면서 애처롭고 가냘픈 백조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드는 음악이지만, 흑조의 변을 담은 이번 작품에 사용함으로써 음악에 대한 편견 또한 깨뜨렸다고 볼 수 있다. 이 공연의 초반에 선보인 <백조의 호수> 속 흑조 솔로와 이 작품이 이어지는 것도 절묘한 구성이었다.
이번 공연의 피날레를 장식한 박소연 안무작 <헝가리안 랩소디>는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의 <헝가리안 랩소디 no.2>에 맞춰 민속적 색채의 춤과 고전발레의 미를 조화시킨 수작이었다. 고전발레 작품에는 발레와 민속춤을 접목시킨 ‘캐릭터댄스’가 종종 들어가 있다. 고전발레에서는 손과 팔의 움직임이 안으로 향한다면 캐릭터댄스에서는 바깥쪽을 향하기도 하고, 두 발을 안쪽으로 모았다가 벌려서 발 뒤꿈치를 서로 부딪히는 움직임으로 경쾌하게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이 작품은 캐릭터댄스와 고전발레의 움직임을 이질감 없이 이은 점이 뛰어났다. 붉은색 옷을 입고 등장한 남녀 무용수가 마치 대화를 주고 받듯이 춤을 추며 관객의 호응을 끌어냈고, 이번 공연을 화사하게 마무리 지었다.
별빛물빛 콘서트 2월 발레 <김용걸의 프로미나드> Ⓒ 양평문화재단
브라보와 박수 소리에 행복해지는 어느 무용수의 발
발레는 그 시작점이 이탈리아의 명문가 메디치와 프랑스 황실이었고, 19세기에는 러시아로 건너가 역시 황실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했다. 우아하지만 그만큼 장벽이 느껴지는 장르이기도 하다. 이번 공연은 김용걸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으며 관객이 친근하게 발레에 다가갈 수 있도록 진행한 점이 돋보이는 자리였다.
커튼콜의 순간, 문득 전반부에 보여준 김용걸 무용수의 파리 시절 영상 한 장면이 떠올랐다. 전철을 타고 가는 사람들의 발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준 장면이었다. 마지막에는 김용걸 무용수의 발이 보였다. 전자는 공간 이동의 역할을 하는 발이라 자유를 주지만, 후자는 춤을 위해 존재하는 발이자 무대 위에서 연습실에서 끊임없이 한계를 느끼게 하는 발이다. 자기 자신을 향해 “바보 같으니!”라고 분노를 표출하다가 다시 춤을 추러 나가는 한 무용수의 의지를 담은 발이었다. 무대 위에서 김용걸은 이야기했다. 무용수들은 브라보 소리와 박수 소리에 행복해지는 사람들이라고. 발레의 역사와 생명은 그 소리를 타고 저 발을 끌고 연습실로 향한 무용수를 통해 여기까지 이어졌다. 그 덕분에 발레는 프랑스의 전유물로 멈추지 않고 전 세계를 관통하는 언어로 우리에게 남았다. 작은 극장 안에서 춤추는 게 행복한 사람들과 그들을 향한 관객들의 브라보가 만났다. <김용걸의 프로미나드>, 발레가 몸의 언어이자 삶인 어떤 발레리노와 함께 한 좋은 산책이었다.
이단비
시사·교양·문화예술 프로그램 및 예술 다큐멘터리의 방송작가로 활동했다.발레에 빠져 다양한 춤과 발레를 배워 오면서 예술 토크와 강연 진행,발레와 현대무용 작품 창작 작업을 통해 무용전문작가로 활동하고 있다.다양한 매체에 춤과 예술에 관한 글을 기고하고,예술책을 집필하면서 무대와 객석을 잇는다. 최근 출간한 <발레,무도에의 권유>가 교보문고 뉴앤핫,세종도서로 선정됐다.